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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경제가 재정보다 우선이다


그리스 신화엔 프로크루스테스란 인물이 등장한다. 침대 크기에 맞춰 사람의 팔다리를 자르거나 혹은 늘여서 죽였다는 악인이다. 이 이야기의 반전 중 하나는 그의 침대엔 길이를 조절하는 숨겨진 장치가 있어서 사실은 어느 누구도 그 침대 크기에 꼭 맞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고약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초유의 위기 와중에 정부가 재정준칙을 도입하기로 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뇌리를 스친 이야기다.


공교롭게도 그 제안된 재정준칙은 유럽연합(EU)이 1993년 출범하면서 합의한 준칙과 같다. 1년 재정적자는 GDP의 3% 이내에서 관리되어야 하고, 국가채무는 GDP의 60%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독일은 이 재정준칙을 회원국 모두가 엄격히 준수하도록 하기 위해 1997년 ‘성장과 안정 협약’이란 걸 이끌어내고, 재정적자가 큰 회원국들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길을 열었다. 문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이 재정준칙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2015년까지 유로존 국가 중 에스토니아, 핀란드, 룩셈부르크만이 이 재정준칙을 충족할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도 상당기간 이 준칙을 지키지 못했다. 2003년부터 2018년까지 국가채무가 GDP의 60%를 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는 회원국들에 이 재정준칙 준수를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특히 2012년 유럽중앙은행(ECB)이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한 회원국 정부채권을 매입해주기 시작하자 이 조치에 반대하는 독일내 일군의 ‘재정보수’세력인 변호사, 학자, 산업계 대표 등이 독일헌법재판소에 유럽연합법 (제123조) 위반 여부에 대한 집단소송을 제기하게 되고, 이후 독일헌법재판소가 “무제한적”인 채권매입은 문제가 있다며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하게 된다. 이 안건이 다시 유럽사법재판소에 회부돼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리고 다시 1년이 더 지난 2016년 6월이 되어서야 독일헌법재판소도 ECB의 정부채권 매입이 불법이 아니라고 최종 판정하기에 이른다. 이런 법적분쟁 와중에 ECB는 정부채권 매입을 중단하게 되고, 유로권 경제는 장기불황에 빠져들게 됐었다. 재정준칙이 경제위기 시에 족쇄가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이번 코로나19 팬데믹 중에는 독일 정부가 가장 적극적인 재정부양책을 시행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지출 확대를 통한 재정부양책의 규모는 GDP의 10%에 달하고, 긴급자금 대출과 감세조치 등 여타의 정부재정을 통한 보증조치들의 규모는 GDP의 30%에 달한다.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의 확장재정책이다. ECB의 경우도 지난 3월 중순 이후로 지난달까지 2조유로(약 2662조원) 이상의 채권을 매입해오고 있다. 사력을 다해 선제적 확장재정 정책을 취해오고 있는 것이다. 장기불황을 통해 경제회복이 재정건전성 원칙에 우선한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 정부는 이 초유의 위기 와중에 EU의 재정준칙을 도입하겠다고 한다. 90여개국이 이러저러한 재정준칙을 도입해오고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실상은 그 재정준칙을 제대로 지키는 나라들이 거의 없다. 미국의 경우에도 1917년 정부부채 상한선이 도입된 이후 90여차례나 상향 조정되어왔다. 2001년부터 2016년 사이엔 14번이나 상한선이 인상됐는데, 그 상한선 조정을 놓고 거의 매년 정쟁이 끊이질 않았다. 급기야 트럼프 정부에 이르러서는 부채상한선을 잠정적으로 중지하기에 이르렀다.


시야를 전 세계로 넓혀 봐도 확장재정 기조는 뚜렷하다.


국제통화기금의 전망에 따르면, 지난 3월 이후 전 세계적으로 집행되어온 재정부양책의 규모는 12조달러(약 1경3536조원)를 상회하고, 올 한 해 전 세계 평균 재정적자 규모는 GDP의 -12.7%, 국가채무는 98.7%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나아가 이런 확장재정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선진 10개국 중앙은행들이 지난 3월 이후 지금까지 매입해온 채권의 규모는 7조5000억달러(약 8452조원)에 달하고, 20여개의 발전도상국 중앙은행들도 사상 처음으로 정부채권을 매입해오고 있다.


한국은 행정부가 갖고 있는 재정권한이 이미 지나치리만큼 강하다. 헌법 제57조는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회가 예산증액을 할 수도, 새로운 지출항목을 만들 수도 없는 것은 다른 민주국가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은 재정준칙 도입이 아니라, 재정을 어떻게 더 과감하고 효율적으로 집행해서 고용을 유지하고, 소비와 투자의 선순환을 만들어나갈지에 모든 정책역량이 모아져야 할 때다. 그나저나 프로크루스테스는 그 자신이 만든 침대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경향신문, 10월30,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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