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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한 세상사를 하나의 개념이나 지표, 일관된 이론으로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세상사, 우린 모든 걸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기를 꿈꾼다. 불확실성이 점증하는 지금 같은 시기엔 더더욱 그렇다.


정치철학자였던 이사야 벌린(1909~1997)은 이렇듯 세상 현상을 거대 개념, 이론 등을 이용해 일관된 체계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아마도 어둡고 좁은 곳을 찾아 웅크려 있곤 한다는 고슴도치의 습성과 외곬으로 한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성향이 닮아서 그렇게 명명하지 않았나 싶다. 반대로 세상사란 게 여러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서 돌아가니 하나의 고정된 개념이나 이론체계로 모두 설명해낼 수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여우형’이라 칭했다. 의심이 많은 여우의 습성에 빗댄 것이다. 물론 무엇이 더 낫다 혹은 그르다의 구분은 아니고,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런 다른 유형의 사고방식이 미래를 예측하는 데도 영향을 미칠까? 필립 테틀락이라는 정치심리학자가 이 주제로 오랫동안 연구를 했다. 1988년부터 2003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총 284명의 정치·경제·지역 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주요 현안들에 대한 의견을 묻고, 총 8만개가 넘는 그들의 미래예측에 대해 사후 결과를 분석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들이다. 고르바초프가 쿠데타에 의해 물러날 가능성,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백분리(아파르트헤이트)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철폐될 가능성, 걸프전이 발발할 가능성 등등이다.


분석 결과가 흥미롭다. 전반적으로 ‘고슴도치형’ 전문가들이 ‘여우형’에 비해 미래 예측력이 더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의외로 한 분야만을 외곬으로 파고들어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는 고슴도치형 전문가들이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예측력에서조차 여우형 전문가들에 비해 오히려 더 떨어졌다. 협소한 분석과 인식의 틀로 세상사를 환원해서 보려는 성향이 강해져서 숲 전체보다는 나무들의 미시적 차이에 더 주목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나름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우리는 종종 많은 지식과 정보량을 어떤 사안이나 현상에 대한 통찰력과 혼동하곤 하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결과는 5년 이상 되는 중장기적 미래예측에 있어서는 고슴도치형이든, 여우형이든 상관없이 전문가의 예측력이 일반인의 예측력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좀 심하게 말해, 침팬지가 다트 판에 다트를 던져 예측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의 예측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단기 예측의 경우엔 전문가의 예측력이 일반인에 비해 높았다. 결국 미래예측에는 누구나 늘 신중하고 열린 자세로 임해야 함을 시사한다.


하지만 현실에서야 어디 그런가? 미래에 이미 갔다 온 듯 단정적인 예측이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일쑤다. 사람들이 그런 단정적인 얘기를 듣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집요할 정도로 강해서 불확실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 바라는 바에 대해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한다. 사회정치적 쟁점사안일수록 자신과 같은 의견, 같은 성향인 사람들과의 무리지음에 더 몰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양한 소셜미디어의 등장은 이런 확증편향에 기반한 동류적 무리지음을 더욱 강화해왔다. 공론의 장이 같은 정보와 의견이 무한반복되는 거대한 반향실(echo chamber)로 전락한 지도 오래다.


문제는, 중장기 국가 정책과 전략도 이렇게 결정되는 경우다. 위정자들이 자기 진영 혹은 정파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 국정을 운영하다 보면, 국가 전략의 수립과 집행, 사후분석의 단계마다 오류가 발견되기도 어렵고, 오류가 발견돼도 시정하기 힘들게 된다. 비판적 소수 의견이 무시되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를 시정하려면 기존 정책결정 네트워크에 참여하지 않는 외부자의 시선과 비판에 더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비판을 융합해 대안을 만들어내려 해야 한다. 조급하면 같은 진영, 같은 정파의 얘기에만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듣고 싶은 얘기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근본 장점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정 능력에 있다. 문재인 정부는 아직 2년 가까이 남았다.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나 부동산값 폭등 등으로 드러난 일부 오류들에 대해 더 다양한 비판들을 포용하면서 차근차근히 시정해 나아가길 바란다. 미래는 늘 열려 있다. 우리 마음이 닫힐 수는 있어도.


[경향신문, 7월 31일,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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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트럼프·김정은의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후 이 회담 준비에 참여했던 미 국무부 직원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왜 협상이 결렬된 것인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대화 말미에 넌지시 물었다. “회담이 결렬돼서 실무자들은 오히려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았느냐?” 그는 노 코멘트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은 이 ‘의도적 방해(sabotage)’ 가설이 나름 적실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을 포함한 트럼프의 주요 참모진이 북·미 정상회담 자체에 반대했고, 협상을 통한 북한의 비핵화 가능성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었으며, 트럼프가 북한의 완벽한 비핵화 이전에 대북 제재의 부분적 해제를 맞교환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고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나아가, 1장에선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기 전에 트럼프에게 북핵 문제 해법으로 선제군사공격을 제안했다고 밝히고 있다. 새삼스러운 주장은 아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란, 이라크, 북한, 시리아, 리비아 및 쿠바 등에서의 불량정권(rogue regime)을 축출해내는 것이 대량살상무기(WMD) 및 핵무기 확산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정말로 주목해야 하는 건 그의 미국예외주의 관점이다. 그는 미국의 주권은 국제기구나 규범 등과 같은 글로벌 거버넌스에 의해 제한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그는 2002년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설립될 때 미국이 참여하지 않도록 만들어낸 것이 그의 이력 중 가장 기쁜 일이었다고 토로할 정도다. 그렇다면 미국이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건 어떤 경우 가능할까? 선을 대변하는 미국이 악을 응징하는 경우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 선과 악은 미국이 정한다. 철저하게 미국은 예외라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문제는 볼턴이 대변하는 이런 미국예외주의 국제정치관이 극소수 강경 매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국 정치권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려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 의회는 행정부가 동의하거나 합의하고 온 국제협정이나 조약 등을 비준하지 않은 사례가 많다. 대표적으로, 최근의 경우엔 교토의정서, 파리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919년 파리강화조약 이후 창설을 주도한 국제연맹도 비준을 거부해 미국은 회원국이 되지 못했다. 흥미로운 건, 윌슨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그가 말하는 민족자결의 원리는 서구 기독교문명권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인종주의적 관점이 미국예외주의의 뿌리고,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복음주의 기독교 세계관과 결합되어 다른 주권국가에 대한 개입을 합리화해왔다. 볼턴은 이런 미국 개입주의 전통의 대표적 인물이다.


워낙 강성이다 보니,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의원들도 그를 위험인물로 부담스러워했다. 실제 2005년 부시 대통령이 유엔대표부 대사로 임명했을 당시,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던 상원 인준을 받지 못하고 결국 인준 없이 임명되었다가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이 된 2006년 사임했다. 트럼프도 그가 원하던 국무장관 자리에 임명하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로 상원 인준 불가를 들었다. 물론 미국민들에게 볼턴은 이라크 공격의 빌미가 됐던 대량살상무기 존재 여부에 대한 정보를 조작해 당시 파월 국무장관을 오도했던 핵심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나아가, 많은 미국인은 그의 이번 책 출판 의도를 불신한다. 트럼프 재선을 막기 위해 서둘러 출판했다고 주장하고 있긴 한데, 정작 그는 의회의 트럼프 탄핵 국면에선 증언을 거부했었기 때문이다. 책을 더 팔고 본인의 정치적 기반을 지키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많다.


많은 회고록이 그렇듯, 볼턴 회고록도 자기합리화와 변명의 기록이다. 본인은 옳았는데, 트럼프가 문제였다는 것이고, 결국 미국 국내정치용이다. 무슨 경전 대하듯, 자구 하나하나, 파편적 사실 묘사의 진실성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할 성질의 책이 아니다. 외교안보 국익에 오히려 해롭다. 보아하니,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옹호하는 입장에선 미국과 일본의 훼방꾼들 탓을 하기 위해, 반대하는 입장에선 북한의 살라미 전술(salami tactics)과 통미봉남 전술에 놀아난 외교 실패를 지적하느라 볼턴 회고록을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분명 더 치열하게 논쟁해 북핵외교 실패의 오류를 시정해 가야 한다. 다만 볼턴 회고록에 드러난 트럼프 정부의 난맥상을 정확히 이해는 하되, 그가 짜놓은 프레임을 넘어서는 논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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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규칙은 스포츠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상상해 보라. 농구경기에 공격제한시간이 없다면 경기가 어떻게 진행될까? 점수가 앞서는 팀은 계속 공을 돌리기 일쑤일 테고, 지는 팀은 공격권을 가져오기 위해 일부러 파울을 해서 자유투를 유도하는 방법을 주로 쓸 것이다. 실제로 미국프로농구(NBA) 초창기 경기들이 그랬다. 재미도 인기도 없었다. 24초 이내에 공격을 해야 한다는 규칙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격제한시간이 도입되고 나서야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됐다. 조직의 성패도 마찬가지다. 변화를 위해선 기본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


21대 국회가 시작됐다. 코로나19발 초유의 위기 상황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도 ‘일하는 국회’에 대한 요구가 강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제안이 넘쳐나지만, 무엇보다도 상시국회가 정착되길 바란다. 정기국회와 임시국회의 구분은 1948년 제헌국회 때부터 일본의회를 모델로 도입된 것이다. 이젠 시대 상황에 맞게 바꿀 때가 됐다. 헌법조항을 핑계대기도 하지만, 국회법을 바꿔 임시국회를 상시화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사실 대부분의 선진국 의회에선 상시회기가 기본이다. 미국, 영국, 독일의 의회는 상시회기이고, 프랑스도 헌법에서 9개월간의 정기회기를 지정하고 있지만 총리의 요구나 정당 간 협상에 의해 회기연장이 가능하니 상시회기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또다시 원구성 협상에서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한다. 이해는 되는데, 동의하긴 어렵다. 국회법엔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첫 임시회 일정 및 상임위원장 선출과 관련해서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법5조에선 “첫 임시회는 의원의 임기 개시 후 7일에 집회”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41조엔 상임위원장은 “본회의에서 선거하며, 첫 집회일부터 3일 이내에 실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대로라면 6월8일 이전에 모든 원구성이 마무리되어야 한다. 관행과 법이 충돌할 땐, 당연히 법이 우선해야 한다. 그게 법치고 민주정치다.


한국에선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미국 의회에선 원구성 협상이란 것 자체가 없다. 상하원의 모든 상임위원장직, 심지어 소위원회 위원장직도 다수당이 당연직으로 차지한다. 물론 회기 중에 상임위원회나 본회의 소집은 언제든 가능한 구조다. 여야 합의를 전제로 하는 한국 국회의 관행과 사뭇 다르다. 특히 상징적 존재의 의미가 강한 한국의 국회의장과 달리, 하원의 경우엔 하원의장이 다수당 지도부와 협의를 통해 본회의에서 어떤 법안을 언제, 어떻게, 어떤 순서로 심의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상원의 경우에도 실질적으로는 다수당 원내대표가 하원의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일부 한국 언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수당에 의한 ‘의회독재’가 제도화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정치환경은 한국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점은 ‘승자독식’의 다수결 원칙이 선거제도와 의회 운영에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는 이와 달리 선거에선 ‘승자독식’의 원칙을 채택하면서도 국회 운영에선 관행적으로 ‘합의주의’를 채택해오고 있다. 이 두 원리의 불일치가 반복적인 국회 파행과 공전의 원인이 되어 왔다. 독재의 경험도 길고, 사회문화적으로 동질성이 높다 보니 ‘승자독식’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분명 공감하고 이해하는 바다. 하지만 ‘견제를 위한 견제’나 ‘반대를 위한 반대’가 관행이란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상황은 책임정치 구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늘 국회 문 열고 당당하게 정책으로 경쟁하는 정치를 국민들은 바란다.


야당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그동안 여야가 바뀔 때마다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아온 것이 사실이고, 정당득표율과 국회 의석수 간의 괴리도 지속되어왔다. 지난 총선도 지역구 선거결과만 놓고 보면, 더불어민주당의 득표율은 50%에 조금 못 미치지만 전체 253석의 지역구 의석 중 163석(64.4%)을 차지했고, 미래통합당의 득표율은 42%에 달하지만 의석수는 84석(33.2%)에 불과하다. 관행상으로는 미래통합당이 원구성 협상에서 정당득표율에 해당하는 몫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협상은 하되, 국회법에 규정된 원구성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요구를 관철시키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구태다. 여당보다 더 적극적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는 정책들로 승부를 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13대 국회로부터 32년이나 흘렀다. 최소한 상시국회는 기본이 돼야 한다. 지금 과거의 비효율 국회를 반복할 만큼 한가로운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경향신문, 6월 5일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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